(서울=연합뉴스) 하남직 기자 = 프로배구 2022-2023 V리그 여자부 현대건설의 독주 체제를 깨뜨리며 '1위 도약'을 꿈꾸던 순간 흥국생명이 내홍에 휩싸였다.
흥국생명은 2일 임형준 구단주 이름으로 "구단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부합 하지 않아 부득이하게 권순찬 감독과 헤어지기로 했다. 김여일 단장도 동반 사퇴키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구단이 완곡한 표현을 쓰긴 했지만 사실상 경질이다.
이제는 '전 사령탑'이 된 권순찬 전 감독은 사의를 밝히지 않았다. 오히려 권순찬 전 감독은 1위 도약을 향한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
흥국생명은 2일 오전 권순찬 감독에게 사퇴를 요구했고, 이날 오후 사퇴 발표를 했다.
감독 경질의 시점과 사유 모두 논란을 부른다.
지난해 4월 1일 흥국생명과 계약한 권순찬 전 감독은 9개월 만에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V리그 정규리그를 기준으로는 단 18경기만 팀을 지휘한 '단명 사령탑'이 됐다.
지난해 10월 22일에 개막한 2022-2023 V리그에서 흥국생명은 '복귀한 황제' 김연경을 앞세워 흥행몰이했고, 팀의 3라운드 일정을 마친 현재 승점 42(14승 4패)로 현대건설(승점 45·16승 2패)에 이어 2위를 달린다.
관중 동원 1위(평균 4천380명), 정규리그 중간 순위 2위를 달리는 팀에서 갑작스럽게 사령탑을 경질하는 건 매우 이례적이다.
구단주는 "구단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짧게 설명했다.
그러나 '선수 기용의 이견'이 경질을 불렀다는 것이 권순찬 전 감독과 많은 관계자의 한결같은 분석이다.
권순찬 전 감독은 김연경, 김해란, 김나희, 김미연 등 베테랑을 중심으로 경기를 운영했다.
구단 또는 그룹은 '젊은 선수'가 더 자주 출전하길 바랐다.
성적이 나지 않았다면, 구단의 바람도 명분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흥국생명은 3위 그룹과 격차가 큰 2위이자, 독주하던 현대건설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팀으로 평가받았다.
흥국생명이 3라운드에서 얻은 승점 42는, 현대건설이 아니었다면 '넉넉하게 1위'에 자리할 수 있는 점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정규리그가 조기 종료된 2021-2022시즌 흥국생명은 33경기에서 승점 31(10승 23패)만 쌓았다.
2022-2023시즌 3라운드까지 치른 18경기에서 얻은 승점이 지난 시즌 전체 승점보다 11점이나 많다.
프로 구단은 우승을 위해 뛴다.
당장 우승에 도전할 수 없는 팀이라면 세대교체에 무게를 둘 수 있지만, 우승권 구단은 일반적으로 당장 성과를 낼 수 있는 선수들의 출전 시간을 늘린다.
결국, 명분은 베테랑을 중용해 성적을 낸 권순찬 전 감독 쪽에 있다.
이례적인 감독 경질에 흥국생명의 과거까지 도마 위에 올랐다.
고(故) 황현주 전 감독은 2005-2006시즌 1위를 달리던 2006년 2월 시즌 막바지에 경질됐다.
당시 흥국생명은 황현주 전 감독에게 '수석코치 강등'을 제의했으나, 황 전 감독은 이를 거부했다.
김철용 전 감독이 지휘봉을 이어받아 2005-2006시즌 통합우승(정규리그 1위·챔피언결정전 우승)을 달성했지만, 김 전 감독도 2006-2007시즌을 준비하던 중 해임 통보를 받았다.
흥국생명은 다시 황현주 전 감독을 사령탑으로 선임했다.
황현주 전 감독은 2008-2009시즌 초반 1위를 달리던 중에 또 경질됐다.
황현주 전 감독에 이어 흥국생명을 지휘한 이승현 전 감독은 약 70일만 팀을 이끌다 사의를 표했고, 어창선 당시 수석코치가 감독대행으로 남은 시즌을 이끌었다.
흔들리던 팀을 추슬러 2008-2009시즌 챔피언결정전에서 극적인 우승을 차지하며 2009년 4월 정식 감독이 된 어창선 전 감독도 2009-2010시즌 중 팀을 떠났다.
2014-2015시즌부터 2021-2022시즌까지 8시즌 동안 흥국생명을 이끈 박미희 현 해설위원을 제외하면 흥국생명 감독들은 모두 단명했다.
사령탑 부임 후 9개월, V리그 18경기 만에 경질된 권순찬 전 감독은 남은 코치진과 선수들에게 "동요하지 말고, 남은 시즌을 잘 치러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감독 경질의 사유가 '구단과의 선수 기용 이견'에 따른 것이어서, 선수단 분위기를 수습하기가 더 힘겨워졌다. 구단이 나서서 선수단을 다독일 수 있는 분위기도 아니다.
1위 도약을 위해 경기에 집중해야 할 선수들이 구단 고위층의 씁쓸한 결정이 초래한 내홍을 견뎌야 하는 이중고를 겪게 됐다.